일상 기록

나이를 먹어서 친구를 사귄다는 것

우주사탕 2020. 4. 28. 01:02

지난번에 뉴욕행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뉴욕에 있는 모군에게 여차저차해서 갔으면 너를 보려고 했었는데 못가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더니, 지금 뉴욕 시내에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텅텅 비어있어서 처음 보는 광경이 생경하다고, 그냥 여행을 왔어도 신기하고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하하 듣고보니 그렇겠네 하고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너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나니까 이런 말을 들어주고 앉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때에는 가정환경도, 폐쇄적인 성격도, 사색적인 성향도, 가진 능력치도, 거의 모든 것이 적당히 엇비슷한 선후배, 동기들을 쉽게 만나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취직을 하고도 꽤 오랫동안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취향을 공유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어디론가 떠났고 한동안은 회사에서 만난 학교 후배들하고 놀다가 그애들도 다들 결혼하고 나니 최근 몇 년간은 친구가 너무 없어져서 고민을 했었다. 지금 회사에서는 열살 이상 차이나는 애들이랑 놀기도 했는데, 나도 즐겁고 그애들도 나랑 노는걸 즐거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너무 차이가 나다보니 어느날 문득 걔들이 싫은 건 싫다는 얘기를 나에게 부담없이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고, 그러고나니 거리를 좀 두는 게 낫겠다 싶어졌었다.

한 오년 정도 취향에 맞을 것 같아 보이는 모임을 이리저리 찾아 다니며 노력한 결과, 별로인 경우도 많았지만 그래도 적당한 거리감의 친구들이 꽤 생겨서 다시 우리집에 사람들을 초대를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친구가 너무 없었을 때 들어온 집인지라 워낙에 독거인 맞춤형으로 짜놔서 여럿이 모여 놀기엔 불편하긴 하다. 전에 살던 집보다는.. 나는 의외로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서 먹고 마시며 노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기숙사 생활을 오래해서 내 방을 보여주고 남의 방에 드나드는 일에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스스로 이유를 분석한 적은 있다. 근데 남의 집에 가서 노는 건 또 마음이 편치는 않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예의를 차리고, 먹모임 등산모임 독서모임 미술관모임 등 모임의 성격에 맞게 여러 가지로 쪼갠 나를 각각에게 보여주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인생도 친구도 모 아니면 도인 것인데..) 처음에는 실수를 좀 했던 것 같아 혼자서만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몇 있다. 왠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과거의 나를 열심히 설명하던 때도 있었는데 설명하다보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보기에도 낯설만큼 너무 이상한 사람이었네 싶었고, 이제는 나조차도 내가 그랬었나 싶게 혼란스러워서 과거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제는 나도 무섭다. 그리하여 딱히 감추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꽤나 이상했던 나를 감추고 조용한 1인을 연기하고 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냥 조용하기만 한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만 노력의 결과로 이제는 혼자 있고싶지 않은 때에 만날 사람이 없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친구들과 오만 개인사와 이상한 상상들을 공유하고, 죽네사네 쓸데없이 심각하게 고민하며 방구석에 엎어져서 다같이 바닥을 박박 긁던 시절이 오지 않겠지. 턱을 괴고 엎드려 끝도없이 재방되는 섹스앤더시티를 보면서 너는 사만다 나는 미란다 또 너는 캐리를 주워섬기다 소파에서 잠이 들고, 아침에 다같이 일어나서 해장국을 먹으러 나서는 날들도.. 나도 이제는 그닥 심각한 고민도 특별한 취향도 없는 흔한 중년이 되었으니까. 지금의 친구들은 언제까지 친구일까. 나도 이렇게 변해왔으니까 앞으로도 거기에 맞춰 늘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야 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섭섭해진다.